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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상처와 고통의 미학을 시에서 찾다 : 길상호 우리의 죄는 야옹

by 이수진 2020. 12. 31.

이 시집은 그렇게 내 마음에 드는 책은 아니다.

 

우선 제목이 <우리의 죄는 야옹>인 것부터 그렇다. 지극히 개인적인 사정이지만 나는 고양이를 무서워하므로 책 제목부터 그렇게 친근감이 들지는 않는 것이다. 이 책에는 고양이를 소재로 하거나, 고양이가 등장하는 시들이 많다. 그런데 이 고양이들은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앙증맞은 애교의 소유자들이 아니라, 밤거리를 걷다가 눈이 마주치면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길고양이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이 책의 시들에는 무서운 단어가 자주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시의 분위기가 왠지 모르게 우중충하고 섬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불을 덮고 침대에서 잔잔한 팝송을 들으며 읽기에는 왠지 모르게 이질감이 느껴졌다. 나는 자연을 묘사한 전원적인 시들을 좋아한다. 이 책의 시에서도 새, 고양이, 얼음, 연못, 낙엽, 명태 같은 도시적이지 않은, 시골과 어울리는 시어가 많이 등장한다. 그런데 전원적이고 낭만적인 분위기보다는 비밀스럽고 음침한 분위기가 더 많이 다가왔다.

 

이런 이유들로 편한 마음으로 시집을 읽을 수가 없었다. 한낱 학생인 내가 시가 마음에 드네 안 드네 왈가왈부하는 것도 좀 웃기지만, 그럼에도 이 책을 읽으면서 감동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이건 아무래도 내가 상처에 대한 사색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기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부드럽고 안정된 서정적 미감의 아름다운 향유”가 책을 읽는 목적인 내가 “상상의 흔적이며 고통의 흔적인” 길상호 시인의 시를 이해하려 했던 것 자체가 이상한 것 같기도 하다.

 

“상처가 깊으면 깊을수록(육체의 중심부, 심장까지.) 주체는 더욱 주체가 된다.”

 

롤랑 바르트의 말이다. 길상호 시인은 상처를 응시하고 사색하는 시인이다. 그런데 나는 잘 모르겠다. 사람이라면 상처가 깊으면 깊을수록 나약해지는 거 아닌가? 내가 어려서 이해를 잘 못하는 것 같기도 하다. 깊은 상처를 입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길상호 시인이 쓴 시들의 목적은 고통을 벗어나지 않고 깊이 있게 관찰함으로써 성장하는 것일까? 상처를 응시함으로써 성장할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흔히 좌절하는 사람에게 “다 잊어.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라고 말하는데, 길상호 시인은 좌절하게 된 이유를 잊으려고 애쓰지 말고, 제대로 통찰해보라 하는 듯 하다.

 

“연못이 지닌 비밀은 읽어낼 수 없음으로 시인은 그저 머물며 응시하다 물러나고, 그로 인해 연못의 신비는 비밀처럼 깊어진다.……(중략)……벤야민의 말을 빌려 진정한 아름다움은 결코 폭로될 수 없는 비밀로 나타날 때를 제외하고는 결코 파악된 적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책에 첨부된 평론에 나온 문장이다. 대상의 아름다움은 대상의 존재가 아니라 대상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는데서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 그저 비밀로 묻어놓으면 누가 아름답다고 느껴주나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나는 이해하지 못하는 비밀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기 위해 길상호 시인의 시집을 읽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그다지 재미있는 책은 아니었다. 다만 훗날 어른이 되면 모르겠다. 나이가 들면 길상호 시인의 상처의 흔적, 비밀의 미학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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