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동물농장 : 왜 오웰은 우화를 썼을까?

이수진 2021. 2. 20. 14:22

이 책을 처음 읽은 건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어렸을 때 ‘동물 농장’이라는 제목에 재미있는 우화인 줄 알고 읽었던 기억이 난다. 워낙 어렸을 때라 별 생각 없이 읽었는데 어느 정도 자란 지금 다시 읽어보면 좋겠다 싶어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애초에 이 책이 우화의 형식을 지녔다는 점에서 작가 조지 오웰이 살던 당시의 시대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 같다. 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의 편에 서서 영국을 도와주던 스탈린을 대놓고 비꼴 수는 없었을 테니 우화의 형식으로 풍자한 것일 테다. 형식만 보더라도 표현의 자유가 지켜지지 않는 시대상황을 추측해볼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출판인들이 이 책의 출간을 거절했다고도 한다. <트리뷴지>에 실린 조지 오웰의 칼럼이 떠올랐다. ‘내가 원하는 건 이런 표현의 자유가 지켜지는 것이다. 설사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의견이라 해도 알려질 기회를 줌으로써 나는 표현의 자유가 지켜진다고 믿는다.’

 

조지 오웰이 ‘동물 농장’의 지배층을 돼지로 설정한 건 정말 탁월한 선택인 것 같다. ‘돼지’라는 동물을 떠올리면 ‘욕심 많고 더러운’이라는 수식어가 떠오르기 마련이다. 진흙 속에 살면서 먹이도 많이 먹는 돼지는 매우 영리한 동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산돼지들은 긴 주둥이로 땅을 잘 파서 산 인근 밭의 농작물을 파먹어 농민들의 골칫덩이기도 하다. 국민들의 고혈을 착취하여 욕심을 채우는 영악하고 부패한 정치인들. 돼지의 특성을 나열했을 뿐인데 정치인들이 떠오르는 건 정치인들이 꽤나 돼지를 닮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렸을 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착한 스노볼을 나쁜 나폴레옹이 쫒아내고 동물들을 힘들게 했구나!’라고 이해했다. 그런데 이 책을 다시 읽어보니 썩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스노볼이 있었을 때도 우유와 사과는 돼지들만을 위해 비축되었다. 스노볼도 결국은 진정한 지도자가 될 그릇은 못 되었던 것 같다. 스노볼은 트로츠키를, 나폴레옹은 스탈린을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하는데 조지 오웰은 트로츠키를 어떤 인물로 묘사하고자 하였던 걸까.

 

혁명 직후에 당나귀인 벤저민 영감은 아무것도 변한 것 같지 않다. ‘당나귀는 명이 길지요. 당신들 중 누구도 죽은 당나귀를 보진 못했을 거요.’라는 말만 할 뿐. 소설 중반부에도 이런 대사가 몇 번 나오는데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했다. 내 생각에는 벤저민은 이미 포기해버린 것 같다. 오래 산 만큼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되고 자신이 처한 상황도 어차피 변하지 않을 거라 낙담한 것은 아닐까? 존스가 농장의 주인이든, 혁명이 일어나든, 나폴레옹이 농장을 지도하든, 어차피 변하는 건 없다며 포기해버린 것 같다. 현대 사회의 주요 사회적 문제 중 하나인 ‘정치적 무관심’, 또는 ‘정치적 피로’현상도 여기서 기인하는 것 같다. 정치 상황이 이렇든 저렇든 내가 처한 상황은 나쁨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절망. 벤저민은 거기에 빠진 것이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면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 거듭한 한국의 독재 정권이 계속 떠올랐다. ‘반공’을 제 1 국가 정책으로 내세우고 독재 체제를 강화하던 때. 존스와 스노볼을 끊임없이 언급하며 동물들을 세뇌시킨 나폴레옹과 모습이 꽤 흡사하다. 동물들이 스노볼과 공모하여 범죄를 저질렀다 고백하고 개에게 물려 죽는 장면에서는 반대파 인사들을 간첩으로 몰면 그만이던 어두운 한국 사회의 모습이 떠올랐다.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라며 수시로 소리를 지르는 양들은 수시로 ‘북한, 공산주의, 빨갱이’를 외치며 야당을 공격하는 여당 지지자들을 떠올리게 했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신 스탈린을 비판한 소설에서 우리나라 정치상황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꽤 씁쓸한 일인 것 같다. 처음에는 동물 공화국에 대한 자부심과 희망으로 가득했던 동물 농장이 동물들의 노동 시간이 늘어난 것 말고는 아무런 발전 없이 ‘매너 농장’으로 돌아가는 소설의 내용을 보며 독재 권력이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었다.